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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소중함에 대해] 강신주의 감정수업

 

요약

 

감정은 순간적이지만 그렇게 순간적이지만은 않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자신의 감정을 오해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그래서 감정공부가, 감정깨달음이 필요하다.

 

 

48가지의 감정 중, 제일 인상 깊었던 감정과 에필로그 파트를 남기면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싶다.

 

 

 

-자신의 가치관,심지어 종교까지 버릴 수 있는 기쁨, 사랑.

 

‘사랑’

 

“당신 뜻대로 하겠어요”

 

이런 마음이 든 적이 있는가? 이런 경험이 없다면 불행히도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감정에 포로가 되는 순간 황소 고집도 자신의 뜻은 꺾고는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은 까페라떼인데도 상대방이 먹고 싶은 아메리카노를 함께 마실 때 오히려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 상대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가진 신비로운 힘 아닌가. 자신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에 따라 사는데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오직 사랑에 빠질 때만 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자신의 뜻이 좌절될 때 기쁨은 커녕 깊은 슬픔과 좌절을 맛보기 때문이다.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주인의 삶이고, 타인의 뜻대로 사는 것이 노예의 삶이다. 어느 누가 노예의 상태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마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평소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 이것만큼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표가 또 있을까? 자발적인 노예상태에 빠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위대한 감정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의지, 지성, 신념처럼 인간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들도 사랑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발적 포기가 가능할까? 스피노자의 통찰이 절실히 필요한 대목이다.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에티카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특정한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쁨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을 떠날 수도 없거니와 그가 떠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다. 그가 떠나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겠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어가 ‘당신 뜻대로’인 이유를 말이다. 상대방을 붙잡아 두기 위해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가급적 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람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기쁨의 대상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은 헌신적인 것이라고 섣부른 오해는 하지 말자.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방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다. 상대방이 내 곁에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 뜻대로’는 일종의 유혹,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노예로 두고 영원히 존중 받을 수 있다는 치명적인 유혹인 셈이다. 어느 누가 이런 매력적인 유혹을 거부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문득 그 사람의 가치관을 나와 정말 맞지 않지만 지켜봐 줄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이라고.

 

 펄 벅의 소설 [동풍 서풍(East Wind, West Wind)]의 주인공 궤이란이 동양 여인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신념과 어울러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전족을 버린 이유도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신여성으로 사는 아내였던 것이다. 남편은 서양 의학을 배운 계몽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서풍을 껴안기 위해 동풍을 버리는 결단이 어찌 쉬운 결단이겠는가. 동풍에 익숙한 사람이 서풍을 맞으며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바꾸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그래서 소설 속에서 궤이란이 전족을 벗는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궤이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자기 발을 감싸고 있는 전족을 벗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물리적 고통으로 괴로우리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궤이란은 이미 피부가 되어 버린 전족을 기꺼이 벗어던진다. 피부를 억지로 몸에서 떼어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말이다. 사랑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내 외적인 아름다움은 남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건만, 내 고통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는 나를 어린아이 달래듯 위로하려고 했어요. 나는 고통에 못 이겨 그가 누구인지, 그의 직업이 뭔지도 잊어버린 채 종종 그에게 매달렸어요. “궤이란, 우리는 함께 고통을 견뎌 낼 것이오.” 남편은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지만, 이건 단지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걸 생각해 보오. 사악한 구습에 대항한다고 말이오.” “싫어요.” 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서 참는 거에요. 당신을 위해 신식여성이 될꺼에요.” 남편은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러자 그 얼굴도 류 부인에게 이야기를 건낼 때처럼 밝아졌어요.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어요. 또 이후로는 이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 같았죠.

 

 아! 그러나 궤이란의 사랑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러운 구석이 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감행하고 있지만, 남편은 단지 아내가 신여성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존재를 마냥 갈망하게 된다. ‘나’와’너’를 제외한 일체의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남편은 과연 궤이란을 사랑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그가 얼굴에 쌀가루를 곱게 바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에게 “제발 나를 위해 이런 식으로 얼굴에 떡칠 하지 마시오. 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좋소.”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은 궤이란 자체보다 그녀의 외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관심을 주고 그렇지 않을 땐 무관심하다면, 이것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겠는가.

 

 그렇게 건성으로 말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던 남편이 갑자기 궤이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오로지 그녀가 전족을 풀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다. 평생 “달라지고 싶다고 꿈꿔 본 적”도 없는 궤이란이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깊이 몸을 담그기로 결심한 반면, 남편의 관심은 여전히 궤이란 그녀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왜곡된 그녀의 발, 낡은 관습을 상징하는 그녀의 발을 향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남편은 아내를 일종의 계몽의 대상으로, 다시 말해 인류애라는 감정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남편은 전족으로 상징되는 동풍에 아직도 젖어 있는 아내에게 측은지심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신여성 류 부인에게 지어보였던 똑 같은 미소를 궤이란에게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궤이란도 미개한 풍속을 버리고 개화의 길을 따랐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의 남편은 알고 있을까? 진정 불행한 사람은 궤이란보다는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전족을 벗는 순간 궤이란은 자신을 송두리째 바꿀 수밖에 없는 사랑에 몸을 던지고 있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타고 있는 서풍을 버리고 동풍에 몸을 맡길만큼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궤이란과 남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비극이다. 한 사람은 제대로 사랑에 빠져 자신을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상대방을 자기한테 걸맞는 아내인지의 여부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두 사람 사아에 동풍도 아니고 서풍도 아닌 더 격렬한 폭풍우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8p~

 

 

'에필로그'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선과 악(Good and Evil)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good and bad)’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편견, 그것도 아주 해묵은 편견이 하나 있다.”감정은 순간적이어서 맹목적으로 따르면 위험하다.”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어서 감정을 따르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일까? 분명 감정은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감정이야말로 충만한 삶의 정수니까 말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볼까. 역시 감정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예로 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하니까.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그는 좋은 대학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는 보잘것없는 월급으로 노모와 동생들을 돌보기에도 벅찬 생활을 하고 있다. 근데 그와 함께 있으면 그냥 좋다.기쁘다.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는 것. 이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욕망 아닌가.

 

결혼을 꿈꾸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하지 않으면 애인과 함께하는 삶은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결혼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결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복잡한 사회 절차가 바로 결혼 제도 아닌가. 당연히 부모나 친구들에게 결혼의 의지를 피력해야 한다. 곧 친구들에게 자신의 애인을 소개하고, 양가 부모들과 상견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부모나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반대한다. “경제적으로나 여러모로 불안정한 사람과 결혼 하려고 하다니. 너 미친거 아니니.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너의 미래를 잘 생각해 봐.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한 게 아니야. 서로 마음이 식을 때가 오고야 말거든. 그때 너는 우리를 원망할 거야. 왜 결혼을 말리지 않았느냐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로 결혼을 포기했다고 치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과의 미래가 불안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녀는 사랑이라는 현재의 충만한 감정을 포기하고 미래의 완전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한다는 점이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이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그러니 현재 누려야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이제 그녀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분명해졌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어야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현재로 지속되는 순간, 그 둘의 결혼 생활은 정당할 것이며,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잠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잠에서 깨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화려하게 절정에 이르렀다가 언젠가 지게 되는 꽃처럼, 사랑이란 감정도 그렇게 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런 서글픈 순간에 그녀를 휘감고 있는 감정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것이다. 미움이라는 감정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황이라는 감정일 수도 있다. 미움이든 당황이든 사랑이 아닌 그 감정이 현재를 사는 그녀를 규정하는 것이다.

 미움의 대상이나 당황의 대상과 함께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단지 과거에 피었다가 져서 이제는 다시는 못 볼 꽃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미래만 꿈꾸며 사는 것도 문제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미움이나 당황이라는 감정에 부합되는 다른 삶의 방식을 도모해야만 할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감정이든 아니면 남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이든 간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자신이 삶을 충만한 현재로 살아가려면 별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의 감정에 어울리는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을 지키는 방법이니까. 미움이나 당황의 감정이 들었다면 그에 부합하는 삶의 방식은 별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혼일 수도 있다. 어쨋든 미움이나 당황이라는 감정을 안겨 주는 사람과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자는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는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잿빛 삶만이 남겨지는 법이니까.

 

사실 ‘감정은 순간적이다.’라는 말만큼 감정을 모욕하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분명 감정은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것만은 아니다. 감정은 지속적인 것이다. 오늘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내일이 되었다고 갑자기 슬픔을 주는 경우는 없으니까. 오늘 미워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불쑥 탈바꿈하는 경우도 없다.감정은 우리 삶의 속도만큼 충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감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속되는 그 감정의 목소리를 존중하라! 그것만이 당신이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 자유롭고 당당해져야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자유로운 감정의 소유자와 당당한 인격을 무서워하는 법이다. 그건 자신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감히 손대지 못한 과일을 과감히 따먹는 사람을 보고 마음이 편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자신들의 비겁함이 폭로되는 광경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반면 내면에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얼마나 그녀가 지금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삶을 ‘좋다’라고 느끼는지 따위가 그들의 안중에 있을 리 없다.진짜 비극은, 그녀가 자신의 ‘좋음’을 버리고 부모나 친지들이 ‘선’이라고 평가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 자기 삶의 정수였던 감정을 포기한 거라는 진실을 알까?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리는 평가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말한다.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좋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라! 나의 삶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선택하고, 반대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을 거부하라!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지 간에 상관없다. 간혹 ‘좋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고,’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자신의 감정과 삶을 교살시키는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선과 악’이라는, 부모나 타인들의 가치 평가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이런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배신하게 만드는 두 가지 이유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두 번째 이유다.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해서 누군가와 결혼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스피노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연민은 기본적으로 슬픈 감정이고, 당연히 그것은 ‘나쁜 감정일 수 밖에 없다.’ 연민의 대상, 즉 근본적으로 슬프고 나쁜 감정을 제공하는 사람과 어떻게 사랑의 기쁨을 일굴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파국과 비극은 불가피하다. 이처럼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제대로 식별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불신의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모나 사회의 통념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좋은 감정들과 나쁜 감정들로 양분될 수 있는 48가지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성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감정인데 좋은 감정이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좋은 감정인데 나쁜 검정이라고 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감정의 혼동은 삶의 혼돈을 낳고, 마침내 자신을 불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48가지의 얼굴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에 능통해져야만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행동 기준을 더 단호하게 관철시킬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5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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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감정에 귀기울일 것. 지극히 솔직해질 것. 행동할 것. 고민할 것.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할지 행동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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