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지의 법칙들을 관통하는 사실
“인생은 필연적으로 고통이다.”
“행복을 찾지 말고 의미를 찾아라. 인생은 혼란과 질서, 그것들의 상호작용 그 어딘가에 있다.”
*어깨를 당당히 펴고 걸어라
‘계급제도는 차라리 본능에 가깝다.’
바닷가재는 3억 년 전부터 이어져 바다에 살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찌꺼기 등을 먹으면서 살아왔다. 유난히 음식이 풍부한 곳이 있다. 어느 바닷가재나 탐내는 곳이다. 하지만 장소는 물리적으로 한정되어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곳을 차지하는가? 바닷가재는 가장 강한 녀석들이 그곳을 차지한다. 이것은 대부분 자연이 취하고 있는 방식이다. 보통 제일 강한 수컷이 대부분의 풍부한 지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여성들을 취한다. 무려 인간이 태어나기 아주 한참 전인 3억 년 전부터 이러한 행동들은 이어져 왔다. 싸움에서 진 바닷가재는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었을 확률이 있다. 아닐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움츠러든다. 그래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황임에도 질 확률이 예전보다 현저히 높아진다. 움츠러든 그들에게서 나오는 호르몬은 예전과 다르다.
인간은 과연 다를까?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걸으라고 주문한다. 어깨를 당당히 편다고 당장 비참한 상황이 결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깨를 펴고 걷는 것에는 더는 이러한 문제점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담겨있다. 계속 움츠러들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하며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어라. 남을 비난하지 말고 스스로 더 나아질 방법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라. 오만에서 벗어나라. 자신이 완벽하다는 사고방식이 극한으로 나아간 것이 전체주의다. 우리의 20세기는 전체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사고방식인지 너무나 많은 피로 증명되었다.
통제할 수 있는 것부터 통제하며(당장 가서 방부터 치우라는 이 주장과 맥이 닿는다), 더는 나를 비참한 상황에 던져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뻐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기쁜 것이라는, 사실 웃는 근육이 먼저 움직여 뇌에 자극을 주는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웃어라 세상도 당신을 따라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는 과학이다.
*쉬운 길을 가지 말고 의미 있는 길을 가라
제물과 만족 지연
성경에서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제물을 바치는 법부터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물은 희생하는 것이다.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얻는 것이다. 제물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게끔 되어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완전히 바뀐다.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을 버려야 완전히 새로운 것을 얻을 것이다.
자신만의 구체적인 목표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구제할 수는 없어도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 우리의 문명은 분명 그리스 시대나 노예제도가 팽배했던 시대보다 더 나아졌다. 악이 덜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개인의 목표와 발전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의 발전들이 모여 지금의 문명을 낳은 것이다.
당신의 구체적인 목표는 당신에게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내려줄 것이고, 그러한 행동은 당신의 삶에 가치관과 의미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당신은 그 의미를 붙들고 살아갈 것이다.
*자신을 굉장히 보듬어줘야 하는 사람으로 대하라
중증 치료에서 환자를 퇴원시킨 후 가장 관리가 안 되는 것은 약을 먹는 것이다. 바쁘다 까먹었다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 안 먹어서 다시 병원을 찾아온다. 의사들은 그들이 약을 왜 안 먹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그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생각까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심리학자는 그렇게 행동을 못 한 것까지 자기 일의 범주에 포함한다.
이런 이들도 자신의 사랑스러운 강아지나 다른 사람들의 약은 잘 챙겨주곤 한다. 사랑스러운 마음과 눈으로 말이다.
여기에서 핵심질문은 이것이다.
'왜 자신에게는 그렇게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느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누구나 그렇다는 말로는 전혀 위로되지 않는 핵폐기물 같은 감정과 생각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기와 강아지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은 거의 똑같다. 강아지가 무언가를 잡아먹기 위해 사냥감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갓난아이가 나의 얼굴을 마구 때린다고 그 아이에게 증오감과 분노를 가지지 않는다.
그 아이는 아직 배워가는 과정이고 아직 아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훈육을 거친다면 완전히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본능이고 아직 그들이 교육이 덜되었고 덜 되었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돌본다.
범위를 다른 사람들, 내가 아닌 사람들로 돌려보면 좀 핀트가 달라진다. 그들은 나만큼이나 추악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보다 남들을 더 사랑하고 챙겨줄 수 있게 된다.
나 또한 그러한 사랑으로 대할 수는 없는 걸까?
*스스로 제한 두기
종교의 시대 때는 강력한 교리와 행동지침이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었다. 현대에는 신은 죽었고 자유라는 강력한 종교가 들어섰다. 누군가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서로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 시대이다. 누가 누구의 삶이 더 낫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독단적인 믿음이 세상을 어떻게 죄로 물들게 하는지 겪었다. 히틀러와 마오쩌둥은 자신이 하는 생각과 자신이 만든 문화가 무조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러한 시대를 겪은 문명이 어떻게 하나의 생각을 믿고 밀어붙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좋은 문화와 가치라는 것은 명명백백히 존재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것들까지 거세한다면 너무나 아까운 것이다. 아깝기 이전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 산다고 하여도 스스로 제한을 두고 행동지침을 두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처럼, 종교 이전부터 우리에겐 어떠한 관습과 전통이 존재하였다. 그것들 안에는 공동체를 사랑하고 남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등 다양한 행동지침과 미덕들이 존재했다. 그것들의 강력함을 종교는 무엇보다 잘 알았고 몇천 년에 걸쳐 그 시스템을 정교하고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종교는 어떠한 사상보다도 오랜 시간 깊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당신이 종교가 있든 없든 스스로 제한을 가해야 한다. 그러한 제한은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다. 고통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포기와 허무주의의 길로 가는 것은 스스로를 완전한 고통의 굴레로 빠뜨리는 것이다.
*당신의 방부터 치워보라
삶은 언제나 고통이라는 것과 두 가지의 길. 포기해버리는 길이나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 더 나빠지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어라. 더 나은 삶이란 삶의 사소한 모든 것들을 전보다 더 나아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결국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비열하다. 삶보다 죽음이 더 의미가 있는 이러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톨스토이조차도 용감하게 자살하는 것이 최고의 답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인간의 삶은 왜 그렇게 악하고 고통스러운 것인가? 왜 비극의 연속인 것인가?
*창세기에 담겨있는 의미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뒤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들은 자의식이 생겼다. 가장 첫 번째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이들을 보면 알려주지 않아도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시기가 온다. 주번에 보는 모든 사람이 옷을 입었기 때문일까? 늑대인간의 예를 생각해보아도 결국 공통적인 결론은 자의식과 부끄러움은 깊숙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뒤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내린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천사에게 지키게끔 시킨다. 에덴동산에는 영생을 주는 과일과 선악과가 있었다. 영생을 주는 과일을 먹지 못하게 에덴동산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던 시절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설사 그것을 허락하였다 하여도 자의식이 생긴 아담과 하와는 죄책감으로 곁에 가지 못한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지 느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교묘하게 속이기 위하여 어떤 문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등 우리는 정말 수만 가지의 이유로 거짓말을 한다.
우리가 진실하게 말하면 누군가가 상처받는가?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걸까?
*이 많은 고통과 비극 속에서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목표를 가져야 한다. 목표가 없는 인간은 고통을 더욱 악화시킨다. 행동이 당신에게 의미와 가치관을 부여한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면 그다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이다.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알려면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무서운 현실이 숨어있다. 내가 어떠한 계기로 나쁜 삶을 살거나 나쁜 태도를 보이거나 뭐가 되었든 나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내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파레토의 법칙이 있다. 80/20 법칙, 빈익빈 부익부 법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되는 법칙이다. 선순환이든 악순환이든 점점 강화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나쁜 친구들이랑 있으면 계속해서 나쁜 구렁텅이에 빠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선순환을 가지는 사람들과 악순환을 가지는 사람들이 초반에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별 차이가 없다. 어떤 사소한 계기로 그 흐름을 계속해서 탔을 뿐이다.
많은 성공의 법칙 중에 자신의 롤모델을 두라는 것과 당신이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라는 말은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든 그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두라는 말이다. 환경이 나를 만든다. 내 의지가 환경을 만든다. 다시 환경이 나를 만든다. 순환한다.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들은 당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기분 상함을 드러내며 떠나려고 하며 화를 낼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곁에 있는 것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에 함께 있는 것이며, 당신을 지켜봐 주는 감시자를 곁에 두는 것과 같다.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이 더 오래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 서로를 피드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걔다가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보통 당신보다 더 먼저 당신이 원하는 길이나 다른 길을 앞서 나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당신에게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길을 가길 바라는 것이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 분명하게 말한다는 것.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말하겠다는 것은 카펫 아래에 숨어있던 용을 들춰내겠다는 것이고, 용이 있다고 선언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과 어떤 규칙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인지하고 살아간다. 삶은 미친 듯이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자신이 보는 것이 세상 전부일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무언가 의심이 들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그걸 좌시하면 안 된다. 그걸 회피하고 말하지 않고 침묵 속에 묻어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카펫 밑의 용처럼 점점 커져 나갈 것이다. 용은 어떤 본질적인 문제다.
우리는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문제를 명백하게 드러내겠다는 뜻이고 실패와 고통을 맞닥뜨리겠다는 뜻이다. 문제를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장이다. 문제를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성공도 실패도 할 수가 없다.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매한 그 상태, 언짢지만 여태껏 죽지 않고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라 예상되는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른다는 것은 아직 실패인지 모른다는 것과 같고 나에게 더욱 큰 고통은 아직 들이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를 무시하고 덮어놓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커져서 당신의 삶을 썩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는 자신의 별 B612호에서 매일 청소를 한다. 몇 개 안 되는 분화구를 열심히 닦는다. 그리고 씨앗을 분류하고 싹을 걸러낸다. 그 싹 중에는 바오밥나무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바오밥나무나 장미나 씨앗일 때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싹일 때도 무언가 차이는 있지만 별문제가 없으므로 그냥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왕자는 바오밥나무가 점점 자라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다. 바오밥나무가 크면 자신의 작은 별을 완전히 삼켜버릴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바오밥나무 그림을 그리면서 누구나 경각심을 가지길 바라는 아주 무서운 그림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바오밥나무씨앗은 바로 문제이고 바오밥 나무는 우리가 무시하고 회피하고 버려둔 그 시간을 먹고 자란 용이다.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고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는 그냥 내버려 두어라.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안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 타는 것이다.”
이 구절의 핵심 문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삶에 비극과 고통은 언제나 팽배하다. 그것은 필연이다. 우리 자신을,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해준다면 그들은 식물인간이 될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아닌 소녀와 소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강해지길 기대하고, 그것을 바래라. 지금 가혹해야 사회에 나가서 대접을 받는다. 어차피 닥칠 고난이라면 강한 상태에서, 내가 유능한 상태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좋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동일 때가 있다. 앞서 저자가 아이들을 키울 때의 원칙은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최소 원칙 최소 행동.”
규칙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아이는 강박을 가질 확률이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규칙만 지킬 확률이 있다. 그것들만 지켜내면 무사히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키우고 싶다면 삶의 대원칙을 정해서 그것만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가족의 문화로 만드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강력한 방법이다_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나머지는 개인이 판단하고 이어가고 부딪히고 점검하고 다시 부딪히는 게 좋다. 왜냐하면 우리 개개인은 어떤 집단 정체성안에 묶어들 수가 없다. 개개인이 너무나 다 사소하면서도 거대하게 다르다. 이건 정말 중요하다. 어떤 사람에게 맞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완벽하게 틀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삶에서 어떤 대원칙을 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원칙을 정하려고 한다면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미국에는 스케이트 스토퍼라는 것을 공원마다 설치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크게 다칠 수 있다는 명분이다.
융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행동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면, 행동의 결과를 유심히 관찰해보라.”
스케이트 스토퍼로 아이들은 공원을 떠나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자신의 용감함을 위험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 과연 스토퍼를 설치한 사람들의 내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수미상관
삶은 고통이다. 행복보다 의미를 찾아야 한다. 쉬운 길을 가기보단 의미 있는 길을 가라. 의미가 사람을 살게 한다. 큰 절망에서 작은 절망으로 이동하게 한다. 스스로 정말 진실 되라.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어떤 관계에서 회피하기 시작한다면 그 문제는 바오밥나무가 될 것이다.
당신이 정말 성공할 것처럼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라. 인간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당신의 위치, 절망, 악순환을 일으키는 절망의 고리, 다 알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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