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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위한 종교_알랭 드 보통

 

# 세 줄 요약

 

종교 이전에 우리 선조들은 아주 우리에게 유용한 관습들을 지니고 살았다. 종교는 그것을 빠르게 습득하였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종교적인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I. 교리가 없는 지혜

 

종교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었던 여러 의식, 교리, 교훈 등을 각 종교는 빠르고 깊게 흡수하였다. 로마의 신전이던 곳은 예배당이 되었고, 연말마다 음식을 나누고 즐거워하던 날은 예수님이 오신 날이 되었다. 무신론자들은 이러한 요소를 ‘종교적’이라고 하여 완전히 배척하고 제거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만의 특권이 아니다. 이 책은 종교가 잘 유지해오고 지속해서 진행해왔던 것들에 대해 고찰하고 세속의 세계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함을 언급하고 있다.

 

II. 공동체

 

오늘날 우리가 옆에서 잠자고 밥 먹고 아이를 키우고 잠자리에 드는 이웃에게 너무나 지독하게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보다 인구밀도가 너무 높다. 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접할 확률이 높은데 더욱 무관심해진다고? 그렇다. 사막에서 사는 베두인족은 손님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환대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게,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주게끔 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요소에 오히려 더욱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도 굳이 누군가를 돕거나 인사를 건네거나 하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

 

 두 번째로 장소.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곳/시간은 바쁜 지하철, 공항, 버스 등이다. 거기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이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이다.

 

 세 번째로 굳이 우리가 아니어도 된다. 라는 생각이다. 굳이 우리가 누군가를 돕거나 하지 않아도 정부가, 우리가 낸 세금이 누군가를 돕는다. 우리는 정부에 우리의 급여 절반 또는 그 이상을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여도 된다고 하는 아주 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 바로 앞사람의 절망과 고통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무관심해질 수 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도울 사람들이 있다거나, 많다거나 하는 은연의 생각이 크게 작용한다.

 

최후의 만찬

 

종교에서 공동체에는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식사다. 기독교를 살펴보면 식사 시간이 곧 예배의 순간이었다.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는 시간을 매번 가졌다. 그리고 음식에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포도주는 무엇이고, 이 전병은 무엇이고 하는 식이다. 이런 의미 만들기와 규칙적인 의식은 공동체를 더욱 강화한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중에 우리는 이완된다. 편한 분위기와 즐거움이 배가된다. 그 사이에 설교를 끼워넣는 테크닉은 세속에서도 보고 배워야 한다. 

 

옛날보다 현대인이 더욱 공동체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예 혼자 지내고 싶어 하거나 강렬하게 공동체에 속하길 바라는 그 마음. 

 

*바보의 날,공동체에 강하게 속하고 싶은 욕구와 공동체를 강하게 거부하고 싶은 욕구

 

인간이 반드시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진솔하게 대화를 하지 못해서라는 생각은 조금 순진한 생각이다. 인간 내부에는 공동체 자체를 거부하고 파괴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존재한다. 

 

종교는 이러한 점을 아주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철저히 행동 양식에 제한을 두려고 한다. 교훈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딱딱함은 뚜껑을 닫아놓은 오래된 와인과 같다. 와인이 맛있어지려면 한 번씩 뚜껑을 열어 김을 빼주어야 한다. 아니면 병째 폭발한다. 그래서 중세에는 바보의 날이란 것이 있었다. 그 날은 다들 빨가벗고 돌아다니거나 음경에 공작털을 붙이고 돌아다니거나, 만나는 사람이면 성별 상관없이 성행위를 하는 듯한 시늉을 하거나 하는 등 그동안 억눌려왔던 기분을 표출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바보의 날이기에 용인된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 아내도 자기처럼 바보의 날이기에 즐기고 왔겠거니 하고 다음 날 평상시로 돌아오게 된다.

 

 *성당과 현대의 커뮤니티 센터

 

어떤 공간에 있는지, 물리적인 요소만 놓고 보아도 공동체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 성당의 조도, 엄숙한 분위기, 높은 공간감, 향기, 돌의 질감 등이 주는 그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현대의 쉽게 지어진 커뮤니티 센터를 생각해보면 그런 고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얼마 없다. 

 

III. 친절

 

*자유주의와 온정주의

 

현대인에게 누군가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은 굉장히 불유쾌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또한 불유쾌한 일이기는 마찬가지다. 

 

IV. 교육

 

현대에 종교를 대적할 만한 유일한 것은 아마 교육이 아닐까 싶다(자유의지 추종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런 교육을 대표하는 기관은 대학이다. 대학과 종교단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계속하여 가르치려는 점이다. 차이점은 가르치는 종류의 수와 방법이다. 대학을 먼저 살펴보자. 대학은 다양한 종류의 것을 방대하게 쏟아 붓는다. 그리고 아이슈타인 뉴턴등이 평생에 걸쳐 깨달았던 것을 단 몇 학기 만에 이해시키려 하고 그렇게 학생이 학습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우리가 학습하는 이유는 선대의 오류와 산발적인 노력들로 얻어낸 시간을 사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대가 고생하여 터득한 것을 빠른 길로 배우는 건 좋은 것이다. 지식에 대해서는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데 지혜는 어떠할까? 그럼 대부분 사람이 손사레치면서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지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오!” 

 

하지만 종교의 자세는 현대인들의 것과는 다르다. 지혜는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것이고, 매우 구체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부분에서도 하나하나 지시하려고 한다. 그래서 종교의 시대에는 하나의 건축,하나의 미술에도 교훈적인 내용을 담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는 사람의 아주 본질적인 면을 잘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은 아주 잘 까먹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감동적인 명저를 읽고 이렇게 살아야지 하고 가슴 뜨거운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지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는 현상을 자주 경험한다. 

 

종교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날짜와 특정한 시간에 그것이 떠오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반복한다. 몇 안 되는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단테나 아우구스투스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평생 읽은 책의 반에 반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때의 책값은 집 한 챗값과 동일했다. 몇 사람이 몇 년 동안 달라붙어야 책 한 권이 나오는 것이다. 그때 책이라고 해봤자 대부분이 성경이고 많아 봤자 성인들의 이야기였다.현대에는 책이 매우 많고 매우 싸다. 커피 몇 잔만 안 먹어도 산다. 어떤 책은 커피 한 잔 값보다 싸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가 오히려 우리의 지혜를 습득하는 데 도움이 안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흔하므로 그 속에 든 내용도 가볍고 흔하게 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많은 내용이 아니라 한 내용의 지속적인 숙지다. 삶까지 들어오려면 우리는 정말 많은 반복을 해야 한다. 종교는 그것을 돕지만 대학은 오히려 방해한다. 수많은 내용을 학습하게 하기 때문이다. 

 

 

godspel, 왜 교수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가? 학생들을 열광시키고 미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대학과 종교단체의 ‘선생님’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고리타분하고 재미없게 수업을 하는 교수, 어려운 내용을 자기들만 이해하는 언어로 말하는 교수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생이 잠에 드는가. 흑인 집회의 목사님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끊임없이 목자들과 소통한다. “믿습니까?” “아멘,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돌아가신 겁니까 아시겠습니까?” “아멘,할렐루야” 가 기본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어떤 내용을 설명하고 목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올리고 그 내용을 절절하게 자신의 가슴속에 새긴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안나 카레리나가 몇 년도에 나왔는지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느끼게 하는데 왜 종교의 저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그게 아니라면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성경에 못지않게 많은 지혜의 내용을 쌓아왔다.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가들이 인간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한 내용을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가는데 알맞게 재편성할 수는 없는가?

 

죽음을 위한 수업, 결혼에 관한 수업, 비참함에 대한 수업이 과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영적 행동, 다도-목욕

 

종교와 대학의 또 다른 차이점은 종교는 끊임없이 하나의 내용을 반복하고 그것을 의식화하고 생활에 담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에서도 모자라 훈련을 통하여 지혜와 정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다도

선불교에서는 다도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해 차를 마시는 것이다. 서양에도 아주 흔히 있는 문화지만 일본에서의 다도란 굉장히 정신적인 활동이다. 다도 시간에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행동에는 의미가 있으며 식기의 모양에도 선불교의 정신이 담긴다. 되는대로 막 구워진 찻잔은 인간 본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강조하는 선불교의 정신이 담겨있다. 

 

유대교 목욕시설,미크바. 그냥 욕조와 같지만 다르다.

유대교에서는 목욕이 있다. 무신론자들도 목욕하면 깨끗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안하면 찝찝하다는 것 정도는 느낀다. 하지만 유대교에서의 목욕은 더욱 심도있고 시스템화되어있다. 575L의 정확한 물의 양을 재어 그 안에 푹 담겨졌다 나오면 이전에 나쁜 마음이나 행동들이 씻기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V. 자애

 

성모 마리아와 관음보살, 특히 마리아는 항상 포동한 아기와 같이 그려진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자

가톨릭의 성모마리아, 불교의 관세음보살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 바로 자애다.우리의 처절한 자기혐오와 구제불능의 감정들, 스스로를 끔찍한 괴물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상상들과 생각들도 그들의 아래에서는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더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가라앉지 않아도 그들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라는 인식이다.

 

무신론자들은 어떻게 몇천 년 전에 있었는지도 모를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들의 가장 큰 무기인 합리성에 빌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굳건하게 유지되고 효용적이냐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어떤 무신론자들의 담론이나 논문보다도 강력하게 사람들을 위로하고 위안을 준다. 

그들이 꾸준히 사랑받고 살아남은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어머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받았던 무한한 사랑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흙탕물에 맘껏 뛰어 옷을 적셔 오든 음식을 온 손가락에 다 묻히고 먹든 따듯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봐주던 그때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종교는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는다. 불완전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은 누구나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타이르고 괜찮다고 말해줌으로써 마음속 깊은 위안을 주게 된다.

 

 

VI. 비관주의

 

*비관주의는 왜 현대인의 삶을 피폐하게 했는가?

 

현대에 가장 팽배해있는 것 중 우리에게 정말 해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낙관주의다. 낙관주의의 기저에는 과학,상업,기술의 진보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이 있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해결할 것이고 종국에는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실제로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왔고, 조금씩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따듯한 물에 샤워하고 집에서 자택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내면의 불신, 죄의식, 혐오, 냉대의 감정들을 씻어내진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중세 사람들보다 못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의지할 곳이라도 있었지 현대에는 그런 것들을 다 자기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자유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비관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애초에 희망이 ‘속세에 있지 않고 저기 머나먼 곳에 있다.’ 라고 설정해 놓음으로써 현실 세계에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죄의식들이 현실 세계에는 당연한 것이며, 그것들은 누구나 겪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세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낙관주의는 기대와 희망을 볼모로 삼는다. 결혼이 현대에 와서 왜 그렇게 불행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바로 결혼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의 결혼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기대가 넘치지도 않았다. 결혼은 더 많은 인내와 배려를 수반해야 하며 새로운 세대를 양육하고 길러내는 제도라고 생각하였다. 낭만적이고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세밀하고 터치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습관/행동들을 강조한다. 어떤 날에는 어떻게 말해야 하며, 심지어 성행위 횟수에 대해서도 조언한다. 직업에 따라 뱃사람은 6개월에 한번 낙타몰이꾼은 몇 주에 몇 번 이런 식이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그 안에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중요한 것들을 까먹는다는 사실과 육신과 정신 모두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VII. 관점

 

 

VIII. 미술

현대에 종교시설과 가장 가까운 곳은 미술관. 하지만 미술관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교훈을 주려하지 않는다.

중세의 미술은 아주 확실한 대상과 이야기가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대중으로부터 해석되는 것 자체가 불명예스럽고 구식이 되는 시대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미술이 가지는 교육적이고 우리의 의식을 되새김해주는 효과를 잃었다.현재의 미술관은 미술품들을 시대별로 분류하였다. 시대별로 분류하면 자연스럽게 유파별로 분류된다. 하지만 미술의 기능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감정별로 분류하는 방법은 어떨까?

 

사랑의 방/가족애의 방/비통의 방/고귀함에 대한 방이런 식으로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느낄 수 있게끔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미술이 가지고 있던 기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있다. 어느 특정 또는 집단이 하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규정할 수 있는가? 규정할 권리가 있는가? 감정의 큐레이팅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현대의 미술과 종교 시대의 미술의 차이는 교훈을 주려고 하느냐, 그런 교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느냐 차이이다. 종교 시대의 미술은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고통받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 나의 고통이 유난히 특별한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였다. 자애로운 성모의 모습을 보여주며 여전히 우리가 의존하고 어린아이 같아질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러한 종교적인 색채를 띤 미술이 현대에 와서는 그냥 연혁을 알아내고 어떤 기법으로 그린 그림인지 알아내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 작가가 무슨 의미를 담으려고 했는지가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 그림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위로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연혁표와 작게 쓰여있는 설명이 어디 있는지 기웃거릴 뿐이다. 

 

옛날 성당이 담당하는 기능을 현재는 미술관이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기대를 품고 미술관에 가고 나오면서 무언가 뿌듯한 기분을 안으며 나온다. 무언가 발전했다는 기분. 하지만 미술관이 미술품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존재한다. 

 

종교에서 미술품이 가져야 하는 의미를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았다. 주제를 좁히고 반복해서 말한다. 특히 미술은 감정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훌륭한 매체이다. 종교는 사람이 매우 잘 까먹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덕목과 감정들을 우리가 쉽게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잊었을 때 아기 예수를 따듯하게 바라보는 마리아를 보여준다거나 손자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IX. 건축

 

가톨릭 시대에 성당은 그 자체로 성경의 역할을 하였다. 성경보다 더욱 직관적이고 장엄하게 신의 존재를 말해주기도 하였다. 교회에 있는 풍부한 장식과 부조,조각들은 모두 말하는 심상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때 칼뱅은 “우리가 신을 섬기는데 성경만 있으면 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모든 장식은 죄악시되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프로테스탄트 성당과 카톨릭 성당은 큰 차이를 보인다.

 

정말 장식은 죄악일까? 카톨릭은 이렇게 항변하였다 “사람이 스쳐 지나고 보는 것에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건물을 통해서도 그들을 교화하고 하나님을 느끼게 하려 한다”

이들의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 말의 진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들은 아주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좋은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사법체계는 그 땅을 소유한 사람까지만을 고려한다. 그것을 맨날 보고 경험해야 하는 많은 평범한 사람을 고려하지 못한다.

 

 신이 없는 무신론자들에게 그럼 카톨릭에서의 성당과 같은 건물은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다. 종교만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여러 전통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중요한 진리를 깨달아 주는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반성의 공간, 존엄성에 대한 공간 등 물론 어려운 주제이고 과제이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로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모든 감각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오래 남는다. 

 

 

X. 제도

 

#근대의 시작

 

중세를 지나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이 중시되는 시대가 왔다. 그 시대는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아들이 잉태되며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는지, 그 증거는 무엇이며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무신론자들이 간과한 것

 

아무리 과학이 많은 것을 일구어냈다고 해서 기존의 종교가 가진 것까지 배척할 필요가 있을까? 종교는 종교가 발달하기 전부터 유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좋은 문화와 에너지를 자기 것으로 흡수했다. 종교는 그만큼 영리했고 지혜로웠다. 그래서 기존의 우리가 익숙해하고 바래하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종교의 장점들을 무신론자도 사용할 수 있고 일궈낼 수가 있다.

 

*제도의 강력함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널리 퍼뜨리고 유지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책을 내고 출판하는 것을 보통 생각한다. 돈이 굴러가는 규모를 영향력의 척도로 본다면 책은 정말 미미하다. 가톨릭에 비해 더없이 미미하고 페브리즈보다 더욱 미미하다. 

 

무신론자들은 보통 홀로 활동한다. 무신론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다고 대표되는 니체조차도 가톨릭만큼 지속하여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제도를 가지고 있다. 제도는 다양한 규칙들을 매우 세세하고 자세하게 지시한다. 이러한 지시는 인간의 중요한 특성인 망각을 고려한 아주 현명한 해결방법이다. 세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순절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큰 스케일에서 작은 스케일까지 다양한 날짜에 그것들을 기록해 놓았다. 

 

달력에 해야 할 일을 적어 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유대교는 봄에 처음 꽃이 필 때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신께 봄의 신비함을 알려준 것에 대하여 정해진 기도문을 읊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규모가 크고 안정적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카톨릭의 교리를 연구하고 추구하느라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카톨릭이라고 선언만 하면 비교적 쉽게 그러한 권리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종교에서 주장하는 교리는 어떠한 개인이 만들어 낸 것이 거의 없다. 없다고 느껴지게 오랜 시간 동안 손보고 논쟁을 거쳐왔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없는 게 바로 이 기나긴 시간이다. 우리는 개인의 과격한 의견에 보통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오랜 세월 검증을 거쳐왔고 “다수의 집단의 의견”이라면 우리는 더욱 쉽게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그렇다 종교인들은 꾸준히 자신들의 생각을 노출해 교리를 익숙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지속

 

종교의 특징 중 하나는 지독하게 어떤 맥락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설교와 말만 하는 게 아니고 건축 미술 미술품 생활 양식 등 하나의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반복한다. 그것이 종교의 지혜로운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독하게 잘 까먹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바꿀 명쾌한 해답을 얻어도 스마트폰 한번 슥 보는 사이에 까먹을 수 있는 것이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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